워런 버핏은 1969년 잡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투자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나의 투자관은 벤자민 그레이엄 85%, 필립 피셔 15%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투자 일생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필립 피셔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지금 다시 인터뷰를 하면 필립 피셔의 영향력을 20%나 25%까지 격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장주 투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피셔. 그의 투자법에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버핏을 매료시켰을까?
피셔의 대표 저서이자,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보수적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Conservative Investors Sleep Well)』를 통해 그 비밀을 파헤쳐 보자.

워런 버핏도 한때는 '단타쟁이'였다
우리가 아는 장기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도 처음부터 장기투자를 지향했던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스승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배운 대로, 기업의 청산 가치보다도 싼 주식을 사서 주가가 장부 가치만큼 오르면 미련 없이 팔아버리는 방식을 취했다.
버핏은 이 방식으로 1950~1960년대에 연평균 20~30%대의 경이로운 수익률을 내고 있었다. 이를 거리에서 한 모금 남은 담배꽁초를 주워 공짜로 피우는 것에 비유하여 '담배꽁초 투자법(Cigar Butt Investing)'이라 부른다. 비록 우아하거나 멋진 방법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안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버핏은 이 방식으로 이미 충분히 괜찮은 수익을 달성하고 있었기에 굳이 기업의 성장성과 장기적 가치를 분석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운용 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시장에서 값싼 꽁초 주식 몇 개를 매수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없는 구조적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시즈 캔디(See's Candies) 인수전
일찍이 필립 피셔의 성장주 투자 철학을 체득한 찰리 멍거는 자본 규모가 커질수록 그저그런 기업을 싼 값에 사는 것보다 위대한 기업을 제값에 사서 장기 보유하는 것이 낫다고 끊임없이 버핏을 설득했다.
이 새로운 철학의 실질적인 시험대가 바로 1972년 시즈 캔디(See's Candies) 인수였다. 당시 시즈 캔디는 장부 가치(순자산)는 8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매도자는 3,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요구했다. 담배꽁초 투자에 익숙했던 버핏은 장부 가치의 3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요구 금액보다 고작 10만 달러가 높다는 이유로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이때 멍거는 시즈 캔디가 가진 압도적인 브랜드 충성도와, 대규모 자본 지출 없이도 매년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무형의 가치(가격 전가력)'를 강조하며 버핏을 설득했다. 결국 2,500만 달러에 인수가 성사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즈 캔디는 이후 추가 자본 투입 없이도 수십 년간 2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현금(배당)을 버크셔 해서웨이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자금은 훗날 코카콜라 등 다른 세계적 우량 기업을 매수하는 든든한 실탄이 되었다.

변화는 단숨에 오지 않는다
물론 버핏이 그레이엄식의 저평가 가치투자에서 벗어나, 피셔식의 '훌륭한 기업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는' 투자 철학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버핏은 훗날 주주총회와 주주 서한을 통해 이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담배꽁초 투자에서 훌륭한 기업 투자로 넘어가는 선명하고 명확한 붉은 경계선 따위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서히 그 방향으로 이동했고, 때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담배꽁초 투자로도 여전히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학습 속도가 느렸습니다." — (2003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만약 시즈 캔디 매도자가 10만 달러를 더 요구했더라면, 나와 멍거는 그냥 걸어 나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어리석었고 학습 속도가 느렸습니다." — (2007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 서한)
결과적으로 버핏이 피셔의 관점을 온전히 체화하는 데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 전환이야말로 워런 버핏이 세계 최대 부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핵심이 되었다. 버핏은 벤자민 그레이엄의 '안전마진'이라는 튼튼한 기초 위에, 필립 피셔의 '위대한 기업의 장기 성장성'을 더했기에 지금의 전설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보수적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의 4가지 투자 원칙
1975년에 출간된 필립 피셔의 저서 『보수적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두 개의 장은 4장에 대한 보충 설명이므로, 실질적으로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4개의 장은 각각 ‘주식 투자의 4가지 핵심 원칙’을 하나씩 설명한다.
이 4가지 핵심 원칙은 훗날 2009년 영국 BBC 인터뷰에서 찰리 멍거가 강조한 투자 원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찰리 멍거가 평생 동안 지켜온 투자 원칙이 바로 이 책에 기반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① 기업의 기초 체력 (기업 이해도)
보수적인 투자의 첫걸음은 기업의 기초 체력을 평가하는 데서 시작한다. 기초가 탄탄한 기업에 투자하라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찰리 멍거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비즈니스 사라’고 말한다. 서로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돈을 잘 버는 훌륭한 비즈니스인지 내가 그 비즈니스를 완벽히 잘 이해하고 있는지 평가하라는 것이다.
피셔는 기초가 탄탄한 기업을 찾기 위해 4가지 요소를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바로 생산, 마케팅, 연구개발(R&D), 재무역량이다. 물론 현대 경영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요소가 고려되고 있다. 가령 ‘인사 역량’은 경영의 80%라 말할 정도로 중요한 영역이며, 특히 지금 같이 AI인재 유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기초 체력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4가지 요소는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는 과거의 평가 기준일까?.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피셔가 말하는 근본적인 원리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피셔의 주장을 해석하자면 좋은 기업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생산), 잘 판매하고(마케팅), 미래에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혹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적절히 투자하며(R&D),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세부적인 형태나 방법은 변할 수 있어도 기본 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앞서 언급한 ‘좋은 AI 인재를 유치 능력’은 ‘생산’ 능력의 하위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상장된 기업 90%가 이 단계에서 걸러진다. 기초 체력을 평가하려면 그 기업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많은 기업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 건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 건설 기업의 비즈니스를 이해하는 것이 쉬울까, 최신 IT회사의 비즈니스를 이해하는 것이 쉬울까?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가 자신이 잘 아는 분야가 아닌, 가장 많은 주가 상승이 있던 기업에 주목한다.
마치 한 평생 살아온 동네 지리를 훤히 꿰고 있듯이, 우리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감고도 그릴 수 있듯이, 그 기업을 훤히 이해하고 있을 때 비로소 기업의 기초 체력을 평가할 수 있고, 투자 고려 대상에 포함할 수 있다. 나머지 90%의 기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투자의 시작이다.
② 인적 요소 (경영진의 역량과 도덕성)
1단계에서 기초 체력이 훌륭한 기업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무능력하거나 제대로 된 경영을 할 의지가 없다면 훌륭한 비즈니스는 무의미해진다. 경영진이 마음 먹고 기업을 망치러 하면 기업이 망가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벤처캐피털(VC)이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가 무엇인 줄 아는가? 비즈니스 모델이나 사업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시장 상황에 따라 빠르게 피벗할 수 있지만, 사람의 본성과 역량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주식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업을 이끄는 경영진이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 중요하게 확인해야 한다. 기업 규모가 작을 수록 사람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실제로 찰리 멍거의 제자이자 전설적인 투자자인 리루(Li Lu)는 관심 있는 기업의 CEO를 깊이 파악하기 위해 그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등록해 관찰했을 정도로 '인적 요소'를 중시했다.
물론 벤처투자와 다르게 우리는 좋은 경영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투자를 결정해서는 안된다. 인적 요소 평가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간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경영진은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적 요소 평가를 맹신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피셔가 인적 요소를 2번째에 배치한 것과 다르게 멍거는 인적 요소를 3번째 평가요소에 배치하였다. 물론 순서가 중요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멍거는 인적보다 비즈니스의 '경쟁력'을 먼저 검증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③ 강한 경쟁력 (경제적 해자와 가격 전가력)
피셔는 이익을 잘 내는 것만큼이나, 그 이익을 외부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강한 해자를 강조했다. 아무리 지금 돈을 잘 벌어도 경쟁자나 시장 변화로 쉽게 그 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면 꾸준히 현금 흐름 중요한 기업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이를 예측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바로 비즈니스의 방어력 즉 ‘경제적 해자’인 것이다
세계적인 투자 리서치 기업 모닝스타(Morningstar)는 경제적 해자를 크게 5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다.
전환 비용
네트워크 효과
비용 우위
무형 자산
효율적 규모
물론 이 5가지에 포함하기 애매한 해자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가 제품 가격을 올렸을 때 고객들이 무더기로 이탈할 것인가 아니면 투덜대면서도 계속 살 것인가?" 이다. 장기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요소가 바로 이 경제적 해자이다.
④ 합리적인 가격
앞서 언급한 훌륭한 기초 체력, 뛰어난 경영진, 강력한 해자를 모두 갖춘 '위대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살 수는 없다. 피셔는 시장의 패닉이나 일시적인 악재로 인해, 위대한 기업의 주가가 내재 가치 대비 합리적인 수준으로 떨어졌을 때 매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주식을 좋은 가격에 사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장기 보유할 수 있는 심리적, 수학적 안전마진이 확보된다.
『보수적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은 1975년에 출간된 고전이지만, 현대 투자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다만, 반세기 전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호흡이 다소 길고 원론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약간의 수정이나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도 있고 말이다. 이런 고전은 직접 다 읽기 보다는 핵심 내용이 잘 정리된 요약본이나 리뷰를 먼저 접한 뒤 관심 있는 장을 발췌해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